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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7~26

 

여러분 전천후 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제가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어떤 기상조건에서도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것입니다. 전천후 타이어, 전천후 여객선, 전천후 영농시설 등으로 쓰일 수 있겠죠? 우리나라는 특히 홍수나 태풍 때만되면 소잃고 외양간고치는 격으로 수많은 피해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또 가물때는 물이 전혀 없습니다. 이럴 때 전천후 영농시설, 배수시설을 잘 갖추고 있다면 얼만나 좋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신앙에도 전천후 신앙이 있겠죠? 어떤 상황이든, 조건이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변하지 않는, 그 신뢰의 관계가 전혀 무너지지 않는 신앙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전천후 신앙인이 되게 할까요? 오늘 말씀 속에서 주시는 은혜를 통하여 전천후 신앙으로 살게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특별히 한 가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시고 긍휼히 여기셨고, 특별히 사랑하셨고, 그들과 교제하시며 가르치셨는데 그 가정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마르다,마리아,나사로 이 세 남매의 가정이었습니다. 이들이 사는 동네는 예루살렘 근처,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 쯤’(2km)이라고 말하고 있는 베다니 라는 동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가정에 종종 방문하셔서 직접 가르치시고 믿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물론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역시도 예수님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이들의 마음 심령에 믿음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뜻하지 않게 두 자매의 오라비인 나사로에게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누이들이 급히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냥 병 들었으면 차도를 기다려보거나 민간요법, 다른 의사를 불렀을 테지만 나사로의 병은 심상치 않은 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급하게 부를 수 밖에 없는 손 쓸수 없는 위독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곳에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원래는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계셨으나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참람하다 하여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피하여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던 곳 요단강 근처 베다바라로 제자들과 함께 가셨던 것입니다.

 

베다니에서 베다바라 라는 곳 까지는 약 120리 정도 약 50km 되는 거리입니다. 건장한 남자가 1시간에 4km를 간다고 할 때 베다니와 베다바라 까지의 거리는 족히 하룻길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낸 전보자가 이 소식을 예수님께 전할 때 쯤에는 그 누이들이 소식을 알리려고 보낸지 하루가 지난 상태입니다. 위급한 사람은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달라집니다. 당장이라도 급히 어떤 조치를 취해야 나사로는 다시 살게 될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소식을 듣고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 채 114에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말씀하시고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아~ 나사로는 죽지 않겠구나~!! 예수님께서 그 병을 친히 고치시겠구나~ 라고 우리는 으레 짐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아마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말씀 1111절을 봐 주십시오 이틀을 지체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시고 또 14절에는 그 뜻이 나사로가 죽었다 라고 풀이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15절에 심지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7절에는 드디어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지났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았을 때 나사로의 죽음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전보가 오기까지 하루, 예수님께서 지체하신지 이틀,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하루길을 가셨다면 이미 예수님께로 전보가 올 때 쯤이면 나사로는 죽기직전 이었거나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백부장이 자신의 병든 하인 때문에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 말씀만으로 원거리에서 그 하인을 낫게 하신 것처럼 낫게 하실 수 없었겠냐는 의문이 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본체가 바로 예수님 자신이셨기 때문에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의 주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을 막으시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못하신게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분명히 그 가정에, 제자들에게, 그리고 그곳에 있는 무리들에게 분명히 놀라운 가르침 즉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는 믿음을 심어 주시려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면서 21에 뭐라 말합니까?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합니다. 나중에 예수님이 온 것을 안 마리아도 32에 똑같은 말을 예수님께 합니다

왜 이들이 주님이 계셨더라면...’안타까워 합니까? ‘죽음이라는 어찌보면 당연한 인간의 최종적 한계앞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낙심과 후회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면 병든 오라버니를 고칠 수 있었을텐데..., 내가 조금 더 빨리 서둘러서 예수님을 불렀더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텐데...’ 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한계선은 죽음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기까지 지체하셨다가 살리러 오신 생명되신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한번 볼까요? 죽음의 문제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다른 어떤 계획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너무쉽게 낙심하고 후회하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나의 기대가 무너지고 문제가 내가 정한 한계선을 넘어설 때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낙심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상상하는 능력, 즉 하나님을 기대하는 믿음을 상실하게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게 반복이 되면 이제 낙심과 후회, 원망과 불평은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역사와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불평하고 원망하며 후회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매일의 양식인 만나를 싫어하고, 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끊임없이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온 것까지도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불평하는 그들의 마음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불평과 불신은 단순히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습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가득한 상태에서 불뱀에 물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통중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으로 놋뱀을 장대에 달아 세워 그것을 바라보면 산다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놀랍게도 놋뱀을 바라보는 것은 매우 간단하고 단순한 해결책 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놋뱀을 바라보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간단한 신앙적 행위조차 이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는 대신 상황에 매몰되어 불신과 원망 속에 머무는 것이 더 익숙했던 것입니다.
복잡한 해결책을 찾기보다 하나님의 단순한 명령에 믿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인데, 그들은 그것을 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벼룩은 근육이 발달하여 자신의 몸길이보다 200배를 뛸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벼룩을 잡아 유리 병에 넣고 유리병 중간을 투명한 유리로 가로막으면 벼룩은 뛰어오를 때마다 등이 유리에 부딪치게 되게 됩니다. 반복적으로 계속 실험을 하면 벼룩은 마침내 유리 높이 직전에서 뛰기를 멈추어 버린다고 합니다. 나중에 중간의 유리 장벽을 없애도 벼룩은 예전 유리벽 전에서 멈추어 버린다고 합니다. 벼룩은 결국 자신의 세계를 유리 칸막이 이하로 국한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한계선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확장되기를 소망합니다. 너무 쉽게 낙심하고 후회하는 것은 생명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태도가 절대 아닙니다. 유리막을 뛰어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원래 우리의 삶을 디자인 하신 예수님의 차원으로 올라가게 될 줄 믿습니다.

 

#믿음을 요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2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그러나 마르다는 말합니다. 24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네 맞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죠. 마지막날 메시야가 오시는날,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대답은 지금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이 아닙니다. 23절에 살아나리라는 지금 살아나니라를 말씀하고 있지만 24절에 마르다는 먼 나중에 죽음에서 부활하여 살아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전히 마르다는 예수님을 문상객 정도로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예수님을 원망하고 있고 서운한 마음이 있고, 죽음, 너무 이른 시기에 헤어짐의 슬픔, 가장없이 살아가야 할 세월에 대한 근심과 염려, 이 물리적 시간의 슬픔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부활의 신앙!! 부활의 능력이 현재의 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동떨어져 있는 사건으로 취급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온통 울음바다가 된 이 현실 앞에서 예수님께서 누구보다 이 슬픔을 공감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며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슬픔을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을 용납하실 수는 없습니다.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고 죽은 나사로를 문상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을 이해하신 다는 것 자체로서도 우리는 큰 위로를 받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이 여기서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절대 우리 삶에 오는 문제들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으로 우리를 내어 보내야 합니다.

 

1. 간음한 여인에게 베푼 자비와 용서 (요한복음 8:1-11)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왔을 때, 사람들은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을 깨우치셨고, 결국 여인은 돌에 맞지 않고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그녀를 용서하고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상황과 죄에 대한 고통을 깊이 이해하셨지만, 죄를 용납하지 않고 회개와 새롭게 사는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2. 제자들의 믿음 부족 (마태복음 8:23-27)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나고 두려워함으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폭풍을 잠잠케 하신 후,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무서워하느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인간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이해하셨지만, 믿음이 부족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 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3. 베드로의 충동적 행동(22:50~51)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날 밤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칼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 참으라하시며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 충동적인 행동은 이해하셨지만, 폭력적인 대응을 용납하지 않으셨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늘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우리가 이해하는 태도를 갖고 있음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진짜 사랑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못하는 습관이 만들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바쁘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굉장히 이해하려고 하는 목사중의 한 사람입니다. 공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렇다고 말씀에 소홀하고, 기도에 게으르고, 신앙생활에 퇴보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의 너무 바빠서 기도합니다라는 책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가을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배우고 큐티와 기도를 매일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주중 공예배인 수요예배와 새벽기도를 나오는 것입니다. 1014일부터~26일까지 통독 특별새벽기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두 참여하시고 통독자로 1층 게시판에 이름을 써 넣으시기 바랍니다. 내년에는 말씀과 기도의 삶을 더욱 공고히 하는 영적인 프로그램들을 더욱 세워갈 것입니다.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이해는 하지만 용납하지는 않겠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의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는 부족한 부활신앙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25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것은 죽은 나사로에게 행하실 일 즉 죽은자가 지금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기적, 생명의 역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것은 슬픔에 빠져있는 마르다 마리아, 제자들과 둘러선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부활신앙을 가지면 우리가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어 지금으로부터 영원한 영생을 얻은 인생이 된다는 복된 말씀이 됩니다.

 

마르다의 한계적 신앙을 깨우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부활신앙은 현재적 신앙입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한계에서 벗어난 부활신앙은 우리의 지금현재의 모든 문제 앞에서 근본적으로 극복하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말씀 서두에 드린 전천후 신앙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부활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몸소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순간 영원한 소망이 넘치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우리의 삶을 부르기를 원합니다.

부활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어떤사람이 한 여인의 칠순잔치에 초대받아 갔다고 합니다. 그 여인은 사남매를 두셨고 30대초반 젊었을 때 암으로 남편과 사별했다고 합니다. 40년이 흐른 칠순잔치 그 자리에서 그 여인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30대 초반에 홀로 돼서 너희를 키웠는데 그때 너희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같이 여행을 떠나자 그렇게 얘기를 하고 같이 여행을 떠나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한시간그리고 내 손 잡아준 그 한시간이 지금까지 40년을 견디게 해주었다 남편이 잡아준 그 따뜻한 1시간을 좋은 기억으로 삼아 평생을 버틴 것입니다.

 

부활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추억하며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계시어 지금 우리 안에 내주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는 것을 넘어, 그 부활의 능력을 자신의 삶 속에서 매일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생명, 죄와 사망을 이긴 승리, 현재의 소망, 고난을 이기는 인내,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부활 신앙은 미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새롭게 하고 능력을 부어주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것을 보여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마음안에 우리의 삶에 살아 역사하십니다.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절대 낙심하거나 후회하지 마십시오!! 이해하고 공감하지만 타협하거나 용납하지 마십시오!!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십시오!! 부활을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저와 여러분 우리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다음시간에 이 본문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실제적으로 살리시는 과정을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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