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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나사로야 나오라!

요한복음 11:38~44

 

1. 돌을 옮겨 놓으라.

3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그러니 다시 마르다가 말합니다.

39절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지금 마르다는 사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없는 원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을 옮겨 놓으라는 단순한 명령에 순종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굴을 막고 있던 돌은 실제로 물리적으로 무거웠지만, 그것보다 더 무거운 것은 바로 사람들의 믿지 못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기라하셨을 때 마르다의 반응을 보면, 그녀는 현실적인 조건나사로의 죽음과 그의 몸이 썩었다는 사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종종 경험하는 인간적인 한계입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의 믿음은 때로 불신과 의심에 눌려 무거워집니다.

 

이러한 믿음의 부족이 바로 영적 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물리적인 돌을 옮기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불신을 옮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그들 앞에서 나타났습니다. 돌이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그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 사이를 갈라놓은 돌!!

 

무슨 험한꼴을 보이려고 그러십니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25-26절 말씀 가운데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을 예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이 의미하신 바는, 마르다의 믿음이 나사로를 부활시키실 조건이란 뜻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마르다가 불신앙하면, 그 나타날 부활의 이적이 눈 앞에 펼쳐져도 영적 눈으로 보지 못하며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믿음으로만 느낄 수 있습니다. 불신앙하는 유대인들도 나사로의 부활한 사실을 보기는 보았으나, 거기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을 가진 자만이 보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47~48절에 보면 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지금 예수님께서 보이신 부활의 기적, 하나님의 영광을 듣고도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말씀대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누리는 자들은 믿음의 자녀들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종종 믿음 없는 마음의 돌, 견고한 진을 치워야 합니다. 의심과 불신이 마음을 가로막고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적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돌을 옮기고 믿음으로 반응할 때, 하나님은 그 믿음 위에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결국,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우리가 의심의 무게를 내려놓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믿음을 요구하시며, 그 믿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열쇠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를 돌아봅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상태라로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사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 믿음의 문제 앞에서 예수님은 끝까지 믿으라, 믿으라,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아니라 아니라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디까지 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우리를 막고 있는 모든 죄악은 최후의 죽음조차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막고 있는 돌을 굴리십시오~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망설여 집니까?

 

예수님께서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집에 물을 아귀까지 채우라 하십니다 포도주가 없는 상황에서 물을 채우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종들은 순종하였습니다.

어부로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목수이신 예수님이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는 그 말이 부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돌을 옮겨놓을 수 있는 행동은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가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태초의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요한복음 11절은 선포합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세상의 질서를 놓으신 분의 말씀이 죄악되고 일그러진 세상에 선포될 때는 믿음과 순종의 반응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우리의 경험과 상식은 부자연스러운 것들이며 아무런 영향력을 드러낼 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돌을 옮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충만히 임하는 것은 돌을 옮겨 놓으라는 어찌보면 단순한 명령에 순종함으로 시작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르다가 해야 하는 일은 죽은자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나지 못하면 어쩔까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도 아닙니다. 순종하여 돌을 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결국은 돌이 옮겨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43절에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십니다. 그러니 정말 죽은 나사로가 죽을 때 시신을 감쌌던 베를 동이고 얼굴에 가린 수건에 싸여서 나오게 됩니다. 죽은 자가 그대로 생명을 입어 무덤에서 나온 것입니다.

의심하던 마리아, 마르다, 제자들, 의심하고 심지어 욕하던 무리들..예수님의 전능하심 앞에 그 권능앞에 의심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큰 소리로 외치다(, 포네 메갈레 에크라우가센)

이 표현은 단순한 음성의 크기를 넘어,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와 생명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죽음의 권세 아래 있던 나사로를 부활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죽음의 문을 뚫고 나사로에게 생명의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이 외침은 창조주의 명령처럼, 죽음에 있는 자에게도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생명의 명령: 예수님의 큰 외침은 단지 소리가 커서 나사로가 들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는 죽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듣는 능력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생명을 불러오는 새로운 창조적 명령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을 때처럼, 이 외침은 존재를 불러내는 창조적 힘을 담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승리: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이 큰 소리로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육신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는 생명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외침은 죽음이 더 이상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죽음이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믿음 없는 자들에게 주는 메시지: 예수님께서 일부러 큰 소리로 외치신 것은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듣고 믿을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큰 소리로 외치셨을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죽은 나사로에게만이 아니라, 믿음 없는 자들에게도 생명의 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큰 소리로 외치신 예수님의 행동은 단순한 음성의 크기를 넘어서, 생명의 주관자로서 죽음을 깨뜨리고 생명을 선포하는 권세의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소리가 아닌,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 죽음에서도 생명을 불러내시는 구세주이심을 깊이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서 나사로야 나오라명령하셨을 때 사망은 더 이상 나사로를 무덤에 묶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의 주관자가 하시는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상태가 너무 절망적이었습니다. 죽을 뻔 한 것이 아니라, 죽을 것 같은 것이 아니라 죽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벌써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상태였습니다. 완벽한 절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나사로를 불러내어 생명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성경에 기록하여 우리에게 읽게 하시는 대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상태가 혹시 오늘 나사로와 같다고 하여도 낙심하지 말라 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만 부르시는 분이 아니시라, 나사로와 같은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나사로를 다 부르시어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절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게 죽음은 원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실 때 죽음은 없었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는 이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의 생명을 받은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인간의 한계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자연스러운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자연스러운 문제 앞에 생명되시는 예수님의 자연스러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막연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안나오면 어쩌지?

 

예수님은 정확하게 나사로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만약 모든 죽음들에게 선포하셨다면 그 무덤에 있는 모든 자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 많은 사람들을 그 순간에 살리셨다면 예수님의 능력은 더 커보이셨을 것이며, 인기와 그 파급력은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무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름을 부르시며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나사로를 부르신 동시에, 거기에 둘러 있는 모든 자들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의미입니다. 돌이 옮겨진 후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십니다.

 

41~42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네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아직 죽지 않은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하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나에게말씀하십니다.

죽음에게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말해 죽음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근식아 나오라!! 우리의 소망을 먼 미래에 두고 현재에는 전혀 소망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 모습을 주님은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 맡기지 못하고 죽어있는, 염려와 근심과 원망과 상처로 숨겨두었던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있습니까? 여러분 선포하십시오 내 영에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나오는 것 뿐 아니라 더욱 풍성한 영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느냐? 열려 있니? 돌을 옮겨놓을만한 믿음과 순종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2.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그리고 예수님 기적은 나사로를 살리는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44절입니다.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을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성경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로 앞장의 예수님의 말씀을 보시죠

요한복음 1010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다시얻은 나사로에게 더욱 풍성한 생명의 삶을 살도록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를 살리시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얽매임에서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십니다. 나사로가 살아났지만 여전히 죽음의 수건을 온 몸에 휘감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의 삶을 살기 어려운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수건을 풀어 놓을 때 그는 능력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수의를 벗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 바로 이 명령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직접 수의를 풀어주지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놓으라고 하신 점도 중요합니다. 이는 공동체가 해방의 과정에 함께 참여해야 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셨지만, 그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이 수의를 풀어주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역할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면, 교회 공동체는 그 영적인 성장을 돕고, 묶여 있던 과거의 습관과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함께 도와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를 도우며,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고 그것을 성장시킬 수 있도록 돕는 공동체입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에서 생명의 회복과 수의의 해방은 구원의 두 가지 중요한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셨고, 그 이후 그의 몸을 묶고 있던 수의를 풀어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영적 의미로 구원의 완성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첫 번째 단계, 즉 영적인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 즉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점진적인 성화와 해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죄와 세상의 속박에서 풀려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죄의 수의를 벗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것이 바로 이 명령의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로 인해 이미 영혼이 죽은 상태였습니다. 아니 죽어서 이미 썩어 냄새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막혀있는 인생의 돌을 옮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살리실 뿐 아니라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셔서 지금 그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능력은 먼훗날의 소망이 아니라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미 영생을 얻고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난 기적은 그 삶을 살아가면서 더욱 기적과 능력이 됩니다. 부활을 경험하고 영생을 얻은 나사로의 삶은 어떻게 살게 될까요? 어떤 믿음으로 살게 되겠습니까? 나사로의 육신은 어짜피 다시 죽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다시 육신의 죽음 육신의 장막을 벗을 것을 소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지리멸렬한 것들에 자신의 삶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의 쓸데없는 걱정과 염려로서 자신의 삶을 아무 능력없이 살아가겠습니까? 그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죠? 한번태어나면 두 번 죽고 두 번태어나면 한번 죽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생에서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인생으로 완전하게 바뀐 것입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입니다. 죽음으로 달려가는 삶이 아니라 이미 얻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마침내 우리의 본향인 영원한 천국의 생명을 향해 달려가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이 됩니다.

 

바울사도의 고백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빌1:20~21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받은 삶이 다시 태어난 삶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같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과도 같은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절의 말씀은 우리의 상태를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생명을 얻은 인생이 더욱 풍성한 생명으로 이 땅을 살아갈 것입니다. 먼 훗날이나 먼 미래가 아니라 소망 넘치는 삶,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는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은 먼 미래의 사건이 아닙니다. 유보되고 막연한 소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성취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그 부활을 현재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활은 장례식에 가서 선포될 말씀이 아닙니다. 그 부활의 능력은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능력이 됩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나사로의 다시 살아난 경험 그 부활의 경험이 오늘 우리 안에서도 역사됩니까? 어떤 삶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성령으로 우리 안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 앞에 막혀있는 것이 심지어 죽음이라 할지라도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문제의 돌을 옮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휘감고 있는 한계의 옷들, 죽음의 수건를 벗어버리고 성령께서 주시는 생명의 옷을 입으시고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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