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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예수 이름의 능력

3:1~10

 

저는 사도행전 3장 전체의 말씀을 오늘과 다음주 두 번의 걸쳐서 나누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기적의 역사들의 관한 말씀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교회가 구원의 공동체, 기적의 공동체, 위대한 복음의 공동체로 더욱 세워지길 소망합니다.

 

# 포기해버린 행복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저자 : 후루이치 노리토시

저자가 스물여섯 살 되던 해인 2011년에 낸 문제작입니다. 이 책으로 일본이 한때 시끌했었습니다. 일본의 상황과 그 안에 살아가는 현대의 젊은이들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라 일본의 젊은이가 일본을 바라본 내용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2010년 국민여론조사, 행복지수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일본 20대 남성 65%, 여성 75%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답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부조리한 사회(경제불안,치솟는물가,높은실업율,초고령사회,저출산,지진,섬나라)를 물려준 일본의 기성세대들은 이 현실이 젊은이들에게 가혹하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하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젊은이들은 행복하다’,‘불행하지않다라고 답했습니다. 일본의 기성세대가 이런 결과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저자인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이것이 당연한 결과라고 하면서 답합니다.(일본의 젊은이들은) 지금은 비록 불안하지만 장차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일본 젊은이들은 사회 부조리에 관하여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생각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자신 주변의 소소한 삶들을 즐기며 순응할 뿐입니다.

 

이런 젊은이들을 일본에서는 사토리 세대(득도했다) 그들은 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또한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쇼오가 나이 전쟁의 패배, 섬나라, 지진과 태풍의 자연재해에 저항할 수 없는 삶, 삶의 한계도 한몫 하겠지요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없기에 현재 내 주변에 있는 것을 즐기고 어느정도 만족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의 삶에 대한 희망이 철저하게 사라졌기에 절망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오히려 그래서 행복하다라는 것입니다. 어짜피 생각할 수 없는 희망을 포기하니까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아마 이런 일본사회를 꼬집고 있는 것이고, 그들이 터득한 는 희망 없는 시대에 싹튼 병적인 삶의 방식일 뿐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닌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행복의 지수가 낮은 우리나라 역시도 요즘은 3,4,5포 넘어서 다포, N포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젊은이들도 일본의 젊은이들처럼 행복을 느끼려면 나름의 사토리(득도)가 필요한 것일까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일본의 그 모습이 보여졌고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

1.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유대인들은 정확하게 하루 세 번 성전에서 기도했는데 제3, 6, 9시입니다. 우리 시간으로 오전 9, 오후12, 3시입니다. 오늘 본문 첫머리에 베드로와 요한이 9시에 성전에 올라갈 새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후 3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간 것입니다. 기도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된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그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러 올라간 것입니다.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마침 사람들이 나면서 못걷게 된 자를 성전 앞으로 메고 나옵니다. 이 사람은 나이가 40여세나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4:22) 40여년동안 한번도 일어나서 걸어본 적 없습니다. 그는 기본적인 생계를 위하여 그 당시는 어떤 일 조차 할 수 없는 시대였기에 할 수 있는 것은 구걸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최선의 삶은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전미문(아름다운 문)이라는 자리를 찾게 되었습니다.

미문() : ,,청동으로 장식된 화려한 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곳, 구걸하기 좋은곳, 최고의 명당입니다. 사람들은 들어가면서 구걸하는자들에게 적선하고 의기양양하게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10절에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볼 정도로 그는 사실 유명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까? 얼마나 그 좋은 자리를 얻으려고 고군분투하면서 열심을 냈겠습니까? 나름대로 그 안에서 살아갈 방법을 잘 찾은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 안에서 그렇게 스스로 만족하려고 노력할 뿐이지 여전히 당시 사람들의 멸시와 무시, 자신안에 있는 한계, 외로움으로 마음과 몸은 많이 지쳐있고 힘들었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구나 성전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당시의 율법은 몸에 장애를 가진 자는 죄인으로 취급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육신적 한계 뿐 아니라 종교제도적인 한계 또한 누구로부터도 마음의 위로를 받을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3.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이제까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종교적 선행이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축복을 위해 그에게 돈을 몇푼 주었지 그를 관심있게 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의 심정을 헤아려주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그도 여전히 아름다운 성전의 문을 바라보는 대신 누가 나에게 돈을 줄 것인가를 주목했습니다. 어떤 다른 삶을 향한 희망도 없습니다. 단지 돈을 조금 더 얻으면 그것이 만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큰 불만과 절망도 없습니다. 성전안의 그 거룩함과 아름다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감격자신과 상관없는 행복이었고 포기해버린 것들입니다. 다만 나에게 돈을 자들에게서, 그 액수에서 위안을 삼고 소소한 행복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마치 일본의 젊은이들 처럼 사토리 세대가 된 것입니다.

 

# 성령의 사람 베드로와 요한의 시선(주목하여~)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주목하였습니다. 이전의 베드로와 요한이라면 이 구걸하는 자를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종교적 의무감이나 복을 받기 위해 동전 몇 개 던져줬을 것입니다. 유대적 시선으로 선긋고 하나님도 포기한 사람들, 어쩔수 없지 않은가?(쇼오가나이)이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의 눈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성령이 그들을 그 나면서 못 걷는자를 향한 그 한 영혼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눈으로 그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이 저 영혼에게는 제약이 있을까? 저 영혼은 왜 태어났음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자격조차 얻지 못했을까? 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예수님이라면 저에게 무엇을 주고 싶으실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상하고 가난한 자 한 영혼에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 성령께서 예수의 심정으로 이 구걸하는 자를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구걸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눈으로 그의 육신의 한계와 마음의 상처, 영적인 한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긍휼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이 성령이 충만한 영적인 눈으로 보면 우리의 육신적인 이 두 눈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고 행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는 것입니다.

 

반면 그 구걸하는 자는 평소에 하던대로 땅으로 얼굴을 쳐박고 시선을 피한 채 최대한 불쌍한 척 보이려 했을 것입니다. 그의 얼굴은 위쪽을 바라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위는 자신이 기대할 곳이 아니었습니다. 늘 땅에 엎드려 최대한 사람들에게 불쌍하게 보이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사람 베드로는 주목하여 그에게 우리를 보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은 늘 바닥만 처다보는 습관, 자신의 한계인 다리만을 바라보며 포기로 굳어져버린 그에게 눈을 들어 자신들을 보라 하면서 시선을 교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단순히 사람들로부터 자비를 얻으려고 바라던 차선책!! 물질적인 것에서 영적이며 본질적인 기대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도전이고 선포인 것이었습니다.

 

오늘 성령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고, “우리를 보라~”하는 음성 가운데 나면서 걷지못하여 구걸하던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떠한 말할 수 없는 소망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나면서 걷지 못한자의 시선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바라보거늘~ ‘에페코는 에피와 에코에서 유래된 합성단어입니다. 에피는 위쪽이란 뜻이고 에코는 붙들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라보거늘~ 이라는 것은 이 나면서 걷지못하고 구걸하던 자가 위를 붙들었다라는 뜻이 됩니다. 갑자기요?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당시 유명인사였습니다. 베드로는 설교할 때 3000명이 회개하였습니다. 늘 성전에 와서 전도하였습니다. 사실 그 구걸하는 자는 눈썰미가 너무 좋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서 세상의 모든 소식 뉴스거리들을 다 듣는자였습니다. 평소에도 베드로와 요한이 짝을지어 전도하러 성전에 오는 것들을 계속적으로 보았을 것이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들었을 것입니다. 마음안에서 어떤 소망이 싹트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도 그날에 그 안에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청교도 작가 나다나엘 호손이 지은 큰바위 얼굴이란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큰 바위 얼굴은 어떤 계곡의 저편 위쪽에 자연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얼굴 형상이며 아주 인자하고 사랑 가득한 얼굴의 모습을 가졌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예언에 따르면, 그 계곡에서 난 사람이 위인이 되면 그 얼굴을 닮는다고 하는, 상징적인 얼굴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어네스트는 어려서부터 자신도 큰 바위 얼굴을 보면서 그런 사람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에는 자칭, 타칭,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하는 네 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대부호인 상인, 큰 명성을 날린 군인, 대통령에 도전하는 정치가, 그리고 시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돈과 명예로 잠시 그 얼굴이 닮았다고 인정될 뿐,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도 닮았다고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평생을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살았던 어네스트(Ernest)의 연설을 듣고 있던 시인이 그의 모습 속에서 큰 바위 얼굴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보라, 어네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을 닮았네.”라고 외칩니다. 소설의 주인공 어네스트는 어려서부터 큰바위 얼굴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의 성실하고 착한 성품, 그리고 깊은 지혜로 인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어네스트는 이웃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를 전해 주었고, 마을을 위해 묵묵히 봉사했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어네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예언된 인물임을 깨닫게 되죠. 그의 겸손하고 성실한 삶 자체가 마을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를 통해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기적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주목하고 바라보시겠습니까?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미문이라 이름하는 아름다운 성전의 문을 보고 자신의 형편을 볼 때마다 그는 성전의 아름다움과 자신의 형편을 늘 대조했었던 인생이었습니다. 오직 물질만을 구걸하는 자들에게 은과금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는 실망감은 어떻겠습니까? 세상 많은 사람들이 여러 다른 목적으로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서 그들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을 때 실망하며 떠납니다. 그래서 당장 만족감을 주기 위하여 은과금 같은 것들을 약속하고 축복으로 위장하는 교회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최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심지어 아이들 사이에서도..
'금융치료'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로 금전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거나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 것을 일종의 '치료'로 비유하는 표현입니다. 관계의 상처나, 마음이 우울하고 힘들 때 누군가가 돈을 주거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 마치 치료를 받는 것처럼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잠시 잊게 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돈의 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돈이 있으면 문제를 해결하기도 쉽고, 당장의 필요를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한 말을 보면, 그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하며 물질로 땜질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중요한 치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나면서 못걷게 된 이 사람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걷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꿈꿀 수 없는 것이었기에 현실의 위안이며 당장의 생활을 위한 금전적 도움, '금융치료'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을 향한 기대와 믿음이 싹트고 있는 그에게 돈 주지 않고, 무엇 선포합니까?

 

#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6"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아멘!! 영적이며 온전한 치유를 선포합니다.

 

이 선포 은과금은 내게 없지만..”그래서 두번째 것을 준다는 것 아니었습니다. 은과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이라도 네게 줄게가 아닙니다.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바로 이것을 네게 주노니... 은과 금보다 더 값진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은과 금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준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할 때 나면서 걷지 못한 자에게 회복된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40여년동안 걷지 못한 자가 다리에 힘을 얻고 걷는 기적을 맛본 것입니다.그리고 8절입니다.

 

8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일어나 걸으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고 단지 몸을 치유하는 기적을 베푼 것이 아니라 그 일어나 걸으라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회복시켜 주신 것이며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격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해던, 저 아름다운 성전 문 너머에 있는 일들은 자기와는 상관없고 포기해버린 행복이었는데 그 문을 넘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안으로 들어가는 자격을 얻고 들어간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충만한 교회, 그 능력의 이름을 누구보다 자신있게 줄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능력의 이름입니다!! 생명의 이름입니다!! 구원의 이름입니다!! 승리의 이름입니다!! 위장된 기쁨이 아니라 근본적이며 영원하고 진실한 기쁨의 이름입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복된 줄 아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지금 가장 거룩하고 복된 지성소 안에 있습니다. 주님과 직접 만나는 이 자리에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부른 목적이 있다. 내가 너를 알고 있다. 너를 향한 계획과 뜻이 있다. 포기하지 말아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우리에게 포기해버린 행복, 어쩔 수 없으니 만족하자 그냥 세상에 순응하며 살자라는 생각이 자리잡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고의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쁨입니다. 또한 우리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기적의 본질과 기적의 형태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적의 본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기적은 그분을 만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형태입니다. 우리가 기적 자체에 열광하고 그 형태에만 집착하면 우리는 또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봐야 할 것은 걷게 된 사람도 아니요 기적을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도 아닙니다.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가장 큰 기적중의 기적은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의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적을 베푸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우리의 삶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육체적 치유, 정신적 회복, 관계의 회복 등,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며 그 능력을 선포할 때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기적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열매로 맺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행하실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할 것입니다. 포기할 건 포기하는게 행복하다고~ 아니요 절대 포기해선 안되는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가운데 주시는 풍성하신 은혜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인생이라는 속이는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 무엇을 얻을까하는 약간의 기대감으로 구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여전히 세상적이며 성전 안에 들어갈 수 없는 부족한 믿음입니다. 심지어 여전히 하나님을 모르고 성전 밖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거 안되면 이거라도 안될까요? 흥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분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것을 소유하시는 만유의 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며 우리는 이 땅의 것만을 구걸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3:1~3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야고보서 1:16~17 16.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17.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잡아 일으켜 주는 손

7절을 보시기바랍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선포한 이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7절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베푸셨지만 손은 베드로의 손이었습니다. 사람을 낚는 예수의 손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잡아 일으키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기적의 손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유일교회는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구원의 공동체입니다. 복음의 위대한 공동체입니다. 위의것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늘을 주목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적당한 믿음은 결국 적당한 결과만을 가지고 올 뿐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믿고 선포하시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며 간증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를 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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