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시편 1편 1~4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시편으로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편 1편은 시편 150편 전체에 대한 서시이자 머리말에 해당되며 나머지 모든 시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방향을 알려주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바라크’ 와 ‘아쉬레이’ - 바라크 : 하나님의 언약의 복
성경에서 복을 나타내는 단어는 두가지입니다. ‘바라크’와‘아쉬레이’입니다. 우리가 보통 ‘복’ 이라고 하면 "바라크"의 복인데 성경에 400번 이상 나옵니다. 인간의 선행과 관계없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큰 긍휼과 자비를 인하여 인생에 내려주시는 복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바라크는 항상 하나님의 언약관계 안에서 누리는 복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지만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복을 간구할 때는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에 기초하여 기도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불가학력적인 언약의 복!! 그리고 그 복이 임하는 것은 나의 선행이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자비,긍휼,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는 복은 모두 자격없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으로서 언약백성(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창12:1~2)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다윗(삼하7:27~29)
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의 귀를 여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셨으므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28 주 여호와여 오직 주는 하나님이시며 주의 말씀들이 참되시니이다 주께서 이 좋은 것을 주의 종에게 말씀하셨사오니 29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게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니라
발람의 축복(민22:12)
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죄송합니다. 바라크(Barak)를 "엿장수 맘대로"라고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엿장수는 변덕스럽고 불공평하고 치우쳤지만 우리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공평하시며, 사랑이 많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바라크’ 와 ‘아쉬레이’ - 아쉬레이 : 하나님과의 관계의 복
"아쉬레이"의 복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자가 누리는 행복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약 40번 정도 쓰이고 있습니다. 바라크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복 이라면 아쉬레이는 하나님과의 관계,교제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가장 불행한 상태는 하나님을 떠나 죄가운데 거할 때이지만 가장 인간답고 행복한 상태는 하나님과의 친밀함 안에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이 ‘아쉬레이’를 번역함에 있어 ‘복’이라고 한다면 의미적으로 맞지만 인생이 참 ‘복되다’,‘행복하다’이 더 어울린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오늘 시편 1편에서 사용된 복이 바로 이 ‘아쉬레이’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5장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시는 산상수훈을 주실 때 쓰인 ‘복’이 바로 ‘아쉬레이’인데 헬라어로 번역하여 ‘마카리오스’ 라고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을 말씀하신 것인데 오늘 시편1편과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나라의 시민된 자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 참여하며 살아가는 복된, 행복한 삶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시편 1편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복을 예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하지 않는 것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걷지 아니하며) /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죄의 점진성 – 따르지 말라 / 서지 말라 / 앉지 말라
죄의 점진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 = 아브라함의 양보, “네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롯은 화려한 땅 소돔,고모라를 선택합니다. ①소돔 근처에 장막을 침 ②소돔 성 안에 거주함③소돔의 지도자가 되어 성문에 않게 됩니다
베드로 = 예수님을 멀리함. ①수제자인 베드로 멀찍이 예수님 따라감 ②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며 서 있음 ③ 세 번 부인,저주,맹세를 함
다윗 = 왕으로서의 본문 망각. ①자신의 부하들이 모두 전쟁에 나갔을 때 한가로이 성 옥상에 올라가 밧세바를 봄, 저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구나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②왕의 권력으로 그녀를 궁으로 데리고와 동침합니다. ③ 밧세바의 임신을 은폐하려고 전쟁중에 있는 남편 우리아를 불러 동침하게 하지만 우리아는 충성되어 전쟁중에 밧세바와 동침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아를 죽이고 밧세바를 뺏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바라크의 복을 받은 다윗은 순간 하나님과의 아쉬레의 축복을 놓쳐 버린 것입니다.
처음 시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떨어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때, 자신의 사명을 망각할 때, 그 근원적인 때를 찾아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빨리 찾으면 찾을수록 돌아오기가 쉽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께서 소아시아 7교회 중 첫 번째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시면서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하고 솔루션을 제시하십니다.
계 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따르지 아니하고, 서지 아지하며, 앉지 아니하고 단계마다 하나님께서는 돌아올 길을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랐다면 걸었다면 돌이키라! 서지는 말아라 섰다면 그 자리에 앉아 버리지는 말아라!!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은 그 빠져드는 과정에서는 잘 모릅니다.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여 편하고 쾌락적인 것들을 따르게 하고 상황을 은폐하고 모면하게 시킵니다. 그 길의 종착지는 파멸의 길이고 악의길 불행의 길입니다. 잡초가 심지 않아도 자라고 그 악한 생명력이 강한 것처럼 죄는 빠져들게 하는 힘이 강합니다. 반면에 말씀을 따르는 길은 당장은 좁고 어려운 길이라도 결국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행복의 소극적인 면 =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2절의 적극적인 추구의 삶으로 완성됨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즐거워하라! 주야로! 묵상하라!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율법을 가장 즐거워하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것을 먹을 때 즐겁습니다. 식사는 이 행복한 감정을 공유하게 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감정들은 항상 슬픔과 한계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이 즐거움이 얼마나 갈까? 이 기쁨이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단지 육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는 즐거움,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삶의 즐거움과 기쁨은 어떤 외부적인 요인도 침범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즐거움, 행복 이라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과 행복과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야로. 시간적의미로는 ‘항상/늘’이라는 것과 주, 즉 낮과 같이‘밝고 형통할 때’에든지/ 야, 즉 밤과같이 ‘어둡고 불통할 때’에든지 때를 가리지 않는 질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삶의 중심에 놓고 사는 것은 우리의 환경적 요인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상하다.는 것은 한번 읽은 후 눈을 감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소리내서 읽다/계속해서 읽다/연구하다/공부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내면에서 의식의 흐름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걱정이나 세상의 염려가 의식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막 떠오르고 외부적으로 우리를 자극 할 수 있지만, 그 흐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구조를 갖게 됩니다. 의식의 흐름은 내가 왜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원인이 없어요 그런데도 의식이 드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감정적이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 우리가 "주님께 맡기라"는 말씀을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 종일 우리가 살아갈 때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런저런 생각들이 튀어 나옵니다 대부분은 걱정과 염려들의 생각이죠!, 그런데 우리의 묵상에 따라 의식의 흐름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의 흐름을 잡는것은 내면의 자연스러운 생각과 감정의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말씀 묵상은 이러한 흐름을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이끌어가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말씀을 통해 삶의 방향을 잡고, 걱정이나 불안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
예화 -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고 삶을 사는 방식 (맺고끊음,들어야 할 것과 듣지 말아야 할것이 분명히 섬) 어느 날 아들과 아버지가 당나귀를 팔러 가고 있었어요. "아버지, 제가 당나귀를 끌고 가도 되죠?" "그럼, 당연하지." 아들이 당나귀의 고삐를 당겼어요. 아버지가 그 뒤를 따랐답니다. 얼마나 갔을까, 마을 사람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이 더운 날씨에 당나귀를 타고 가면 좋을 텐데." 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당나귀에 아들을 태웠어요. 그런데 조금 더 가니까 마을 어르신들이 혀를 끌끌 차는 거예요. "어린 아들이 당나귀를 타고 늙은 아버지가 걷는게 말이 돼?"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니까요."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가 걸음을 멈췄어요. "어르신들 생각이 맞아. 나도 당나귀에 타야겠구나." 아버지가 당나귀 위로 훌쩍 올라탔어요. 그렇게 한참을 갔지요. 두 사람을 태우니 당나귀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어요. "아버지, 저기 시장이 보여요!" "그렇구나. 당나귀야, 조금 더 속도를 내렴. 이랴!" 아버지가 고삐를 당기는데도 당나귀는 꼼짝도 안 했어요. 너무 지치고 힘들었거든요. 그때 어떤 아저씨가 큰소리로 말했어요. "그러다 당나귀가 쓰러지겠소. 당나귀를 팔려는 게 아니오?" "맞습니다. 이런, 당나귀 생각은 못 했네요." 아버지와 아들은 서둘러 당나귀에서 내렸어요. "비실거리는 당나귀를 누가 사겠어? 어디 보자…." 아버지는 막대기와 줄을 구해 온 뒤 당나귀를 막대기에 거꾸로 매달아 묶었답니다. "아들아, 같이 당나귀를 메고 가자꾸나."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메고 시장으로 들어섰어요. 시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깔깔댔답니다. "저 사람들 좀 보게! 당나귀를 왕처럼 모시고 왔구먼." "어! 저러다 당나귀가 떨어지겠네!" 막대기가 부러지면서, 당나귀가 "쿵" 하고 바닥에 떨어졌어요. "아버지, 당나귀가 다쳤나 봐요. 이제 어쩌죠?" "아이고,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이제 팔 수도 없겠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다친 당나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
#복있는 사람 =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 시냇가에 심긴 나무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복’있는 ‘사람’
행복을 나타내는 “아쉬레이”가 복수형인 것은 그 명사가 문법적으로 복수형으로만 존재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곧 그것은 하나님의 복은 풍성하고 다양하게 임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모든일이 형통함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즉, 이 복은 단순히 한 가지 차원의 축복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풍성하게 주어지는 행복이라는 점을 시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복있는 “사람”(הָאִישׁ, ha'ish)은 단수형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개별적인 한 사람,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을 따르는 개인이 복을 받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 복이라기보다는 말씀을 묵상하며 따르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복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 =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 = 시냇가에 심긴 나무 - 나무 스스로는 시냇가에 자신의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그곳에 옮겨 심어야 합니다. 오늘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것은 ‘심다’라는 것이 ‘샤탈’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농부가 그것을 거기에 옮겨 심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시냇가에 심긴 나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의 자리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는 스스로 노력해서 좋은 환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시냇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곳이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시편 1편 3절은 "하나님이 직접 경건한 자를 택하여 은혜의 자리로 옮기시고, 말씀을 통해 그를 영적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 – 세가지 축복
첫째는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철을 따라 = 제때에. 이것은 자연의 질서 안에서의 섭리와 자연스러운 때라고 볼 수 있지만 더욱 영적이고 근본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섭리의 때, 하나님이 정하신 때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를 포함하고 초자연적인 섭리도 나타냅니다. 또 열매는 또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열매를 그들에게 먹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질 때 더 행복을 느낍니다
전도서 3:1~11 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
둘째는 삶의 아름다움의 지속성이 있습니다. 보통 뜨거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개울가에 심지 않는 모든 나무들은 시들어 죽습니다. 그러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하나님께서 그 시내를 흐르게 하시는 이상 모든 더위와 가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잎을 푸르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외부적 상황에 요동치지 않고 늘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렘 17:7~8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 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시 92:12~14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13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14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셋째는 무슨 일을 하든지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형통의 가장 기본은 하나님이 늘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요셉은 지하감옥에서 형통했고,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형통하였습니다.
바라크와 아쉬레이의 관계 가 비로소 설명이 됩니다.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이 바라크와 아쉬레이를 정리하겠습니다.!
탕자 = 아버지와 뗄 수 없는 바라크 언약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사랑하여 아버지를 떠나므로 바라크를 차버렸고 ‘아쉬레이’를 (blesing) 잃어 버렸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와의 바라크의 복을 차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그 바라크의 관계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happy를 찾아 떠났던 아들은 깨닫고 돌아옵니다. 다시 그 행복했던 그러나 미처 몰랐던 ‘아쉬레이’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침내 회복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아 ‘바라크’의 언약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과 자비, 사랑으로 언제나 축복하십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아쉬레이’의 복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가장 즐거움과 기쁨 행복이 그 안에 있습니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러나 내가 누리고자 결단하면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특권의 행복입니다.
'슬기로운 말씀생활 > 주일설교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계시록 3장 강해설교 요한계시록 설교 주일예배 설교 교회의 사명 (1) | 2025.03.14 |
---|---|
예레미야 1장 강해 예레미야 1장 설교 주일설교 주일오전예배 설교 소명과 사명 (2) | 2025.03.14 |
창세기 강해설교 창세기 45장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주일오전예배 설교 주일설교 (2) | 2025.03.14 |
사순절 주일설교 산상변모주일 주일예배설교 누가복음 9장 고난주일 주일예배 말씀 (2) | 2025.03.12 |
주일설교 말씀 시편설교 시편 말씀 시편 126편 설교 시편 126편 1~6절 (0) | 2025.03.11 |
최근댓글